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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재의 보통과학자] 한국사회가 이호왕 연구그룹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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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4 15:26:23 ( 수정 : 2023.08.04 11:45: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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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학술원 제공

한국 대표 의과학자 이호왕 고려대 명예교수. 대한민국학술원 제공

 

“내 인생에서 선택권이 주어졌던 순간은 거의 없었습니다. 난 일정(日政) 때 학창시절을 보냈는데, 그때는 식민지에 과학기술을 가르치지 않아서 공부를 계속하려면 법학과 의학 밖에 없었지요. 의대에서 내과와 미생물학을 선택한 게 유일한 내 의지였겠네요. 한국전쟁 중 말라리아, 콜레라, 매독, 임질 등 수많은 전염병을 보며 이왕 의사가 된다면 많은 환자들을 돌볼 수 있는 곳을 가야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졸업 후 나라의 덕을 입게 됐고, 이후에는 그 은혜를 갚는 길을 갔습니다. 지금 돌아보니 하늘이 정해준대로 인생을 살았어요.” -고(故) 이호왕 고려대 명예교수,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한림원이 만난 사람' 인터뷰 중에서

 

이달 초 작고한 이호왕 고려대 명예교수를 보통과학자로 부르긴 어렵다. 그는 한국 과학자로 드물게 항상 노벨상 수상자로 거론되던 인물이고, 유행성출혈열을 일으키는 한타바이러스를 발견한 1976년 이후, 한국의 과학자사회에서 항상 권위있는 원로과학자로 살아왔다. 하지만 그는 한국을 연구의 현장으로 삼았고, 그의 사회적 지위와 명성 또한 한국사회라는 맥락 속에서 평가받을 수 밖에 없다. 2020년 한국사회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COVID-19·코로나19) 바이러스의 창궐로 팬데믹(전 세계적 대유행)의 공포를 경험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된지 벌써 2년 7개월, 한국은 이제서야 국산 백신의 생산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한국이 처음부터 백신 생산에서 세계적으로 뒤쳐져 있던 것은 아니다. 1991년 녹십자는 이호왕 교수와 함께 유행성출혈열 예방 백신 ‘한타 박스’를 내놨고 이는 한국에서 바이러스 발견자가 진단법과 예방 백신까지 개발한 최초 사례로 기록되어 있다. 한국 백신개발의 역사는 해방 이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4년 전염병예방법이 제정되고, 1970년대부터는 민간 제약사가 백신을 개발하고 공급하기 시작했지만, 현재의 국가예방접종 시스템이 마련된건 2005년이었다. 문제는 이후 한국의 보건전문가들이 지속적으로 백신 자급율의 문제를 제기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2009년 신종 플루와 2013년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에서 백신 조기 확보는 물론 백신 개발에서 주권확보에 실패해왔다는 사실이다

 

한국 정부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염병 상황에서 '이번 정권에서만 터지지 않으면 된다'는 안일한 대응을 해온 셈이다. 지석영이 1880년 우두국을 세우고, 망해가는 나라 조선에서 그나마 천연두가 예방될 수 있는 기초를 만든 한국은, 이제 백신주권을 위해 국가가 엄청난 투자를 해도 선진국을 쫓아가기조차 버거운, 축적의 시간을 놓쳐버린 백신 후진국이 되어버렸다. 2022년 7월 6일, 한국 바이러스학의 초석을 놓은 과학자 이 교수가 별세했지만, 정부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차관을 빈소에 보냈을 뿐이다. 언론은 그의 죽음을 비중있게 다루지 않았다. 2021년 5월, 중국 교잡벼의 아버지라 불리는 위안룽핑이 사망하자 중국 사회 전체가 애도의 물결에 휩쌓였다. 과학기술유공자에 대한 양국의 차이가 양국 과학기술경쟁력에 어떤 차이로 나타나게 될 것인지는 역사가 판단해줄 것이다.

 

주변에서 중심으로, 국제적 과학자의 탄생

 

‘한탄 바이러스’를 발견하고 백신 ‘한타박스’를 개발한 이호왕 박사.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제공

‘한탄 바이러스’를 발견하고 백신 ‘한타박스’를 개발한 이호왕 박사.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제공

 

이 교수는 1928년 함경남도 신흥군에서 태어나 해방과 함께 월남했다. 그는 서울대 의대를 다니면서 미생물학을 가르치던 기용숙 교수의 영향으로 차츰 바이러스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기 교수는 1905년 황해도 송화군 천동면에서 출생해 1929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유일한 조선인 미생물학 교수 유일준으로부터 사사하고 1942년에 만주의과대학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후 조국이 광복이 되면서 경성의학전문학교를 거쳐 서울대 의대 미생물학교실 주임교수가 되었다. 특히 그는 해방 이후 콜레라가 창궐할 때마다 방역업무에 나섰고, 한국 미생물학 분야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이 교수는 기 교수를 ‘기인’이라고 불렀다. 기 교수는 콜레라가 터지면 장비를 챙겨 방역현장에 출동하는 것을 낙으로 여길 정도로 독특한 인물이었고, 철학을 전공한 서울대 교무과장을 찾아가 대학원장이면 바이러스가 무엇인지 정도는 알아야 한다며 슬라이드로 개인강의를 했던 과학자였다⁠. 이 교수는 1974년 기 교수가 별세하자, 서울의대 학장 자격으로 직접 조사를 작성했고 이렇게 썼다.

 

“이 세상에는 학문하는 사람도 많고 연구하는 사람도 많으며 교육자도 많고 대학교수도 많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학문과 운명을 같이하고 최후의 일각까지 교육에 몸을 바친 분은 많지 않습니다. 가신 어른에게 실례되는 표현일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신념(信念)과 자신(自信)의 사나이’, ‘의지와 고집의 사나이’, 그리고 ‘학문과 철학의 사나이’라는 별칭을 가지셨던 선생님이야말로 우리들의 귀감이요,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존재였음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이 교수는 1955년 미국의  전후 서울대 재건 프로젝트이던 '미네소타 계획'에 따라 미국 미네소타대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미네소타대에서 일본 뇌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일본뇌염 연구로 세계적인 학자로 성장해 나갔다. 한국전쟁 직후 한국에선 한해에 약 3000~4000명이 일본 뇌염으로 숨졌지면서 뇌염은 미국립보건원(NIH)에서도 관심을 갖는 전염병이다. 그 덕분에 이 교수는 한국인 최초로 1964년 미국 NIH로부터 5년간 6만달러의 연구비를 받아 연구를 수행하게 된다.

 

1966년 일본이 뇌염예방백신을 개발하자 일본 뇌염 연구의 가치가 사라지면서 이 교수는 미국인 친구로부터 유행성출혈열 연구로의 방향 전환을 권유받았다. 그리고 미 육군 연구개발부의 연구비로 연구에 착수하게 된다. 유행성출혈열은 1940년대 만주 주둔 일본군에서 약 1만 2000명의 환자가 발생했고 이후 한국전쟁 중에 한국군과 미군에서 수천명의 환자가 발생했던 질병이지만, 당시 ‘한국형 출혈열’이라는 별명까지 붙은 이 괴질의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1970년부터 미 육군의 연구비로 시작된 이 교수 연구는 1975년까지 지지부진하다가, 그의 미국인 동료이자 NIH에서 근무하던 벨리슨 박사의 편지에 쓰인 들쥐의 폐에 기생하는 곰팡이 독소라는 힌트를 통해, 들쥐의 폐를 조사하게 됐고 바로 여기서 ‘한탄바이러스’를 발견하게 된다.

 

한탄바이러스의 발견 이후 이호왕의 인생은 크게 바뀌었다.  그는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것은 물론 국내에서 수상할 수 있는 상이란 상은 모두 휩쓸었고, 대한바이러스학회 초대회장, 대한미생물학회 회장, 대한백신학회 초대회장 등을 거쳐 은퇴 이후에도 한탄생명과학재단을 만들어 후진양성에 힘써왔다⁠.

 

네트워크에 걸려든 바이러스

 

이 교수가 연구를 수행하기 시작하던 1970년대는 한국의 연구환경은 열악하기 그지 없었다. 국내 대학 연구소의 열악한 상황 속에서 이 교수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연구네트워크의 구축이었다. 2005년 과학사학자 김근배 전북대 교수는 ‘연구네트워크’라는 개념으로 이호왕 교수의 연구를 재조명해 《네트워크에 걸려든 바이러스》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교수에게는 두 명의 스승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위에서 언급된 기 교수였고, 다른 한 명은 미네소타대 박사학위 지도교수 윌리엄 쉬러 교수다. 김 교수에 따르면 이 교수의 두 스승은 모두 학문적으로 까다로운 성품을 지닌 학자들이었다.

한국의 기용숙과 미국의 윌리암 셔러 교수는 이호왕 네트워크의 출발점이었다. 김우재 제공

한국의 기용숙과 미국의 윌리암 쉬러 교수는 이호왕 네트워크의 출발점이었다. AMEDD 역사 유산 센터 제공

 

쉬러 교수는 제자인 이 교수에게 인간적인 따뜻함을 전혀 보여주지 않았고, 철저히 사무적으로 대했다. 이 덕분에 이호왕은 한국인 특유의 인간적 배경에 호소하지 못하고, 오로지 실력으로 학위에 도전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쉬러 교수는 한국으로 돌아간 제자와 학문적으로는 매우 긴밀한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 교수도 한국의 스승인 기 교수와 미국의 쉬러 교수를 통해 연구네트워크를 확장해 나갔다. 유행성출혈열 연구를 제안한 미 육군의 에드워드 부셔 박사 또한 쉬러의 소개로 만났던 학자였다. 이후 미육군의 연구자들은 이호왕의 연구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 교수는 쉬러 교수에게 크게 의지했다. 한국에 기반을 갖지 못한 그에게, 미국인 지도교수는 가장 큰 배경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교수는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쉬러 교수에게 지속적으로 편지를 보냈고, 쉬러를 통해 연구네트워크를 확장했다. 이 교수가 한탄바이러스를 발견하고 이를 가장 먼저 알린 것도 쉬러 교수였다. 당시 한국은 물론 미국의 연구자들 중 상당수는 이 교수의 발견을 불신했는데, 왜냐하면 미육군이 수십년간 연구하고도 밝히지 못한 유행성출혈열의 원인균을 한국의 무명 과학자가 발견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를 타계하기 위한 방책도 쉬러 교수로부터 나왔다. 쉬러 교수는 제자에게 병원체 검증을 미국 연구자를 통해 맹검으로 증명하라고 제안했던 것이다. 쉬러 교수의 제안으로 맹검이 성공하자, 이후 이 교수의 연구결과는 전세계에서 널리 인정받게 된다.

 

이 교수가 미국 연구자들이 찾지 못했던 병원체를 찾아내고 이 연구결과가 국제적 기준으로 검증되자, 이 교수의 연구그룹은 곧바로 세계적인 연구그룹과의 경쟁에 노출되었다. 당시 유행성출혈열 연구는 이 교수 그룹 외에도 미 육군 연구그룹과 NIH연구그룹의 세 그룹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특히 노벨상 수상자인 대니얼 칼턴 가이듀섹이 주도하던 NIH연구그룹은 거액을 제시하며 이호왕을 유치하려고까지 했다. 이 교수가 그 제안을 거절하자, 가이듀섹은 이 교수 연구그룹의 이평우 연구원을 엄청난 금액으로 유치해 데려갔다. 이후 이 교수 연구그룹은 “미국의 연구그룹들과 ‘드러난 협력’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감춰진 경쟁’을” 벌이는 복잡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김우재 제공

 

미 육군 연구그룹과는 수월한 협력관계가 유지됐지만  NIH연구그룹은 유행성출혈열 연구의 성과를 독차지하려는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세 연구그룹의 경쟁이 과도해지면서, 이호왕연구그룹은 세계적인 의학학술지인 랜싯에 잘못된 전자현미경 사진을 제출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지만 한국의 과학기술 경쟁력이 걸음마를 떼던 1980년대 이 교수는 이미 세계적 수준의 미국 연구그룹과 경쟁하며 그들을 압도하지는 못했지만 선두그룹으로서 뚜렷한 성과를 남겼다. 세계최초 유행성출혈열 예방백신의 개발은 바로 그런 성과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김 교수는 당시 한국의 열악한 환경 속에 이호왕 연구그룹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이 교수가 폭넓게 구축했던 연구네트워크를 꼽는다. 이 교수는 불리한 연구여건과 연구능력을 다양한 연구그룹과 연구자들과의 열린 네트워크를 통해 극복했다. 물론 미국이라는 세계 최강국의 연구자들과의 네트워크 속에서 경쟁과 협력은 동전의 양면처럼 연구현장의 현실이었지만, 세계최고 수준의 연구개발비를 투자하는 국가가 되었는데도 세계적 연구자들과의 열린 연구네트워크 구축에서 크게 뒤떨어지는 현재 한국의 과학자 사회를 돌아보면, 이호왕이 얼마나 선구자적인 면모를 갖춘 과학자였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이 교수는 한국에서 보기 드문 과학자다. 이는 그가 세계적 수준의 연구를 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국제학술지 네이처나 사이언스에 논문을 출판하는 한국인 과학자는 이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 교수는 세계적 수준의 연구를 수행한 것 뿐 아니라, 한 분야를 선도하는 연구를 했던 얼마 안되는 한국 과학자로 기억되어야 한다. 이제 어느 나라보다 훨씬 풍족한 연구환경을 갖게된 한국에서, 이 교수처럼 한 분야를 개척하고 선도하는 과학자가 더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다.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을 집접 찾아가 훈장을 수여하고, 칸 영화제 수상 배우를 청사로 불러 만찬을 제공한 대통령은 이 교수의 죽음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중국의 농학자 위안룽핑이 사망했을 때, 시진핑 주석은 직접 후난성 서기를 보내 가족을 위로하고, 그를 추모했다. 또 다른 이호왕이 한국에서 등장하는걸 기대하는건, 부질 없는 일인지 모른다. 다행히 한국의 과학사학자들은 이호왕을 깊이 연구해놓았다. 신미영 박사의 아래 논문들은 이호왕을 깊게 이해하기 위한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항상 하늘이 정해준 길을 갔다고 말했다. 이호왕 교수의 명복을 빈다. 출처 과학기술한림원/김우재 제공

그는 항상 하늘이 정해준 길을 갔다고 말했다. 이호왕 교수의 명복을 빈다. 출처 과학기술한림원/김우재 제공

 

※참고자료 

-살아있는 과학기술계 위인 ‘이호왕 박사’, "하늘이 정해준 길을 갔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웹진 ‘In+Sight’, 2015.06 https://kast.tistory.com/127

-http://www.mo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3437

-https://m.dongascience.com/news.php?idx=55234

-http://www.bizhankook.com/bk/article/21881

-https://www.dongascience.com/news.php?idx=51350

-이호왕의 자서전은 이 신문에 연재되었고, 모두 볼 수 있다. 

http://www.graphys.co.kr/bin/bbs/bbs.htm?page=1&table=150503232134&&limit=10&keykind=&keyword=&bo_class=&fpage=&spage=

-박성래,and Park Seong-Rae. "바이러스와 반세기를 함께한 이호왕." 과학과 기술 37.5 (2004): 98-101.

-http://www.doctors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47260

-이규식. (2007). 기용숙의 연구와 생애: 콜레라 연구를 중심으로. 의사학, 16(1), 71-81.

-http://www.graphys.co.kr/bin/bbs/bbs.htm?table=150503232134&st=view&page=4&id=137&limit=10&keykind=&keyword=&bo_class=&fpage=&spage=&showmemo=on

-http://www.graphys.co.kr/bin/bbs/bbs.htm?table=150503232134&st=view&page=4&id=137&limit=10&keykind=&keyword=&bo_class=&fpage=&spage=&showmemo=on

-박성래, "바이러스와 반세기를 함께한 이호왕." 과학과 기술 37.5 (2004): 98-101.

-김근배. (2005). 네트워크에 걸려든 바이러스: 이호왕의 유행성출혈열 연구. 한국과학사학회지, 27(2), 1-25.

- http://www.doctors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47260

 

※필자소개 

김우재. 어린 시절부터 꿀벌, 개미 등에 관심이 많았다. 생물학과에 진학했지만 간절히 원하던 동물행동학자의 길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포기하고 바이러스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박사후연구원으로 미국에서 초파리의 행동유전학을 연구했다. 초파리 수컷의 교미시간이 환경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를 신경회로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모두가 무시하는 이 기초연구가 인간의 시간인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다닌다. 과학자가 되는 새로운 방식의 플랫폼, 타운랩을 준비 중이다. 최근 초파리 유전학자가 바라보는 사회에 대한 책 《플라이룸》을 썼다.

 

출처: 동아사이언스(2022.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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